억새들은 아마도 바람의 방향에 따라 세상에 저항하지 않고 유연하게 살아가는 순리를 선택한 것 같았다. 아라이가 자연의 순리를 운명처럼 따라온 것처럼......엄마거미로서 일생 중 가장 중요했던 산란과 알들의 위장 작업까지 마친 아라이는 이제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아라이는 한참 동안 알집을 바라보다가 알집위로 느릿느릿 이동해 갔다. 그 걸음걸이는 흐느적거렸지만 비장한 각오를 한 듯 보였다. 알집 위에 도착한 아라이는 최대한 다리를 벌려 알집을 품안에 안았다.아라이의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알주머니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아라이는 품속에 있는 알들을 바라보았다. 과거 엄마의 품속에서 보았던 미지의 세계.이제는 반대로 내 품속의 아이들을 보고 있다. 아슴아슴한 시간의 연속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밖에 누구 있어요?”알집 안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가 혼미한 정신을 깨웠다.“누구니?”“엄마예요?. ”“그래, 네 엄마야.”“엄마, 그런데 너무 추워요”“그래 좀 추울 거야, 엄마가 따뜻하게 해줄게”아라이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밀착해 알집을 끌어안으며, 따뜻한 체온을 전달해 주었다.“이제 따뜻하지?”“네 엄마 따뜻해요. 엄마의 품이 최고예요”아라이
가을이 단풍처럼 익듯이 아라이의 몸 색깔도 점점 더 짙어간다. 별이 높고 성글다. 제법 매서워진 바람을 통해 이제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시기라는 것을 아라이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더 늦기 전에 알을 낳아야 해”“어디가 좋을까?”“저기 처마 밑이 좋을까?”“엄마라면 어떤 장소를 선택하겠어요?” 엄마의 말 대신 찬바람만이 휭 하니 불었다. 아라이는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음을 느끼고 거미그물을 타고 가까운 잣나무 곁으로 이동해 갔다.“뾰족한 잎 때문에 인간들이나, 새들로부터 안전하게 우리 새끼들을 잘 지켜주실 꺼야”아라이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잣나무아주머니 곁에 제 아이들의 알들을 낳고 싶어요. 부탁드려요”“부탁이라니 당연히 내가 돌봐 줘야지.”아주머니라면 우리 아이들의 훌륭한 보호자이며, 보모 역할까지 잘 해주실 꺼라, 아라이는 생각하였다. 구름한 점 없던 하늘에 환한 미소를 띤 엄마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잣나무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엄마의 무한한 사랑처럼 느껴졌다. 아라이는 큰 시름을 덜게 되었다. 산란 위치가 너무 낮으면 이듬해 봄에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이 바람을 타고 분산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것이고, 너무 높은 곳에 산란을 하면 겨
회색빛 하늘에 매서운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갔다. “안녕, 난 클락이라고 해”아라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클락을 바라보았다. 아라이의 마음속을 점령해 버린 캔에 대한 그리움과 캔이 아닌 허탈감이 아라이의 마음을 양분해 버리고 있다는 것을 클락은 알 수 없었다.제철보다 늦게 심었던 탓에 이제야 수염이 부쩍 자란 옥수수가 눈앞에 들어온다. 키도 제법 커서 이제 웬만한 사람보다도 더 크게 자랐다. 멀대처럼 자란 옥수수는 두어 세 개(자식 인심 좀 풍족하게 쓰지.......) 아라이도 몸에 묻은 물방울을 먼저 걷어낼 찰나, 빙그레 웃는 흐릿한 물체를 보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캔의 모습이 확대경처럼 시야에 들어왔다.캔도 웃으며 아라이를 맞이하였다.“안녕 캔”“안녕 아라이”“캔, 그 동안 어디 있었어.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아라이는 흐느끼듯 말하였다. 캔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싶었다. “이곳으로 너를 보내고, 난 담장 위에 있다가 갑자기 부는 역풍에 담장 너머로 날아가게 되었어. 그 곳에서 거처를 만들고 너를 찾았지만 니 흔적을 알 수 없었지. 그리고 네가 성장하기만을 기다렸다. 네가 어른이 되면 반드시 나를 찾는 페르몬을 풍겨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지...”캔…
밤사이 비가 내렸다. 아라이는 몸에 붙어있는 물방울들을 다리와 입을 이용해 털어내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묻어 있으면 행동에 지장이 많고, 먹잇감을 포획하는 데에도 방해만 될 뿐이다. 아라이는 몸에 묻어있는 물방울을 다 제거하자 이제 자신의 거미그물에 묻어있는 물방울을 제거하기 위해 세로줄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비가 온 뒤 하늘은 맑았다.아라이는 다시 거미그물을 만들고 자연을 살펴본다. 뭉게구름을 뚫고 빛 한 자락이 들어온다. 무한하게 펼쳐진 그림 속에 자연이 있다.아라이는 자연을 살펴보면서 비 때문에, 오랫동안 허기에 굶주려 있었다는 사실 조차도 잊었다가 된장잠자리가 거미그물에 걸려 전해오는 진동으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라이는 이미 예비 소화되어 있는 잠자리의 몸속에 입을 통해 체액을 입안 가득히 빨아 마셨다.배부른 아라이는 그 새 잠이 들었다. 모처럼 달콤한 잠에서 깨어난 아라이는 건너편의 아리언니와 테리언니에게 인사를 건넨다. 밤사이 이상한 꿈을 꾼 테리언니 이야기 때문에 맑은 하늘에 오물을 끼얹은 듯한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그 순간 하늘에서 낯선 물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곤 아리언니의 거미그물에 커다란 구멍이 났고, 언니도 보이질 않았
처음으로 거미그물을 만들기로 했다. 아라이는 이미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설계도에 따라 집짓기를 시작하였다. 튼튼하고 먹이가 잘 걸리는 위치를 선정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아라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점액성이 묻어있는 거미줄을 호두나무 아저씨의 나뭇가지가 있는 방향으로 분사하였다. 때마침 부는 바람 때문에 점액성이 강한 거미줄을 목적지를 향해 날려 보냈다.과거 어떤 경험도 없었지만 그저 본능에 따라 자신의 거미그물을 만들어 나갔다. 아라이는 점액성이 강한 사냥터 골조공사를 마무리하고 유연하면서도 강력한 거미그물을 완성하였다. 불의의 곤줄박이 공격을 받은 아라크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절치절명의 순간에 놓여 있었다. 아라크는 본능적으로 아라이를 구하기 위해 아라이를 역풍 속으로 던져 버렸던 것이다. 곤줄박이의 시선을 유인하기 위해 아라크는 땅 쪽으로 곤두박질쳐 내려오기 시작했다. 곤줄박이는 무서운 눈으로 응시하며 아라크를 공격해 왔다. 아라크는 좀 더 많은 거미줄을 분사하기 시작했다. 공격하던 새가 주춤하기 시작한다. 아라크가 분사한 거미줄의 일부가 곤줄박이의 눈앞에 걸치기 시작하자 새는 방향을 선회하여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아라크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아라이는 몸속에 있는 실샘을 이용해 실젖을 통해 거미줄을 만드는 것을 기억의 저편 세포 속에서 깨우기 시작했다. 아라이는 실젖을 문질러 거미줄을 내어 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쉽게 거미줄이 만들어 졌다.아라이는 앞장서 오르면서 뒤에 있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 무리 중에 아라크도 보였다. 아라크도 다른 형제들이 처 놓은 거미줄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무리들은 안전을 위해 모두 한 덩어리처럼 뒤엉켜 뭉쳐 있다. 서로 의지하며 거미줄로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듯 얼기설기 뭉쳐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감에 그나마 위안을 느끼며 새로운 삶에 대한 긴 여정을 잠시 잊고 있을 찰나, 갑자기 어디서 낯선 그림자가 점점 길게 드리워지더니 우리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바로 인간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인간은 아무런 적대행동을 하지 않고 사라져 갔다.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상수리아주머니의 가지 끝 잎새들이 새로운 아침을 알리듯 재잘거린다. 악몽같이 길었던 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아라이는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기억나는 것은 두려움뿐이었다. 앞서 오르던 한 동료가 소리친다. “이제 곧 새 세상을 향해 힘찬 비행을 한다구”“비행이라구?”“그래 새로운 비행” 아라이는…
푸르기만 한 5월.조용하기만 하던 산실 내에서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침입자다” 형제들의 비명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치 큰 녀석의 그림자가 점점 다가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녀석은 “애사마귀붙이”란 놈이었다.애사마귀붙이 어미는 우리들의 산실에 알을 낳고 놈이 우리보다 먼저 부화하여 자라나서 우리의 형제들을 잡아먹는 것이었다. 이놈은 식성도 왕성하여 한 번에 수 십 마리나 되는 우리 형제들을 먹어치우는 아주 무서운 놈이다. 심지어는 산실 내에 있는 동료 전체를 다 잡아 먹고 나서야 그 곳을 떠나는 놈도 있다고 한다. 저항할 수 없는 우리들로선 정말로 대적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놈이다. 먹성 좋은 애사마귀붙이의 공격에 우리 형제들 절반 이상이 희생을 당하였다. 그나마 살아남은 형제들도 다치고 병들게 되어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아갈지 걱정이 되었다. 애사마귀붙이의 공격에 살아남은 형제들이 알집을 뚫고 세상 밖으로의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아라이도 살아남은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알집을 깨고 밖으로 나왔다. 아라크가 다가와 아라이를 끌었다. “아라이, 뭐해 빨리 움직여야지....”“어디로?”“어디긴 어디야 우리 형제들 곁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거의 없는 민통선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찾아왔다. 아침식사를 마친 병사들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족구를 즐기고 있다.무심한 구름은 방향키 잃은 조타수처럼 각자의 마음속에 양 구름도 되었다가, 비행기 구름도 되었다가 사라져 간다.계절을 재촉하는 풀벌레 소리는 저마다의 세레나데를 부르며 님을 찾고, 상수리아줌마도 어느 새 다가올 계절을 맞이하여 주황색 앞치마를 두르고 겨울 채비에 분주하다.밤에 짠밥 통에 여러 마리의 산돼지들이 다녀 간 모양이다.밤새 뒤척이며, 들었던 소리 중에 하나가 바로 산돼지 아저씨들의 먹성 좋은 속삭임을 알게 되었다.아라이는 세상 밖으로 나와 처음 맞이하는 세상구경에 설레 였다. 엄마의 모습 저편으로 일부분만 보이는 하늘이지만 늦가을 하늘은 명주처럼 아름다웠다. 처음으로 대하는 낯설지만 아름다운 풍경들에 넋을 잃고 말았다.“아라이 내말 들리니” 엄마의 거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아라이는 잠시 후 대답한다.“네. 엄마 듣고 있어요.”“사랑하는 내 딸 아라이..엄마가 없더라도 아라크와 다른 형제들과 잘 지내야 한다. 너희들 주변엔 너희의 생명을 위협하는 새들 분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이 많으니 서로 돕고 살아야 모
어둠의 정적은 말이 없다휴전선을 경계로 두고 움직이는 장병들의 움직임만 때때로 분주하다.남에서 부는 바람이 분단의 한을 싣고 산마루에 맴돌다 한숨처럼 사라진다.한 밤의 정적을 깨는 길 잃은 노루가 천방지축 뛰어다닌다.어둠도 길을 잃었다.엄마의 인기척이 들리자 아라이와 형제들은 안심 섞인 푸념을 한다.“엄마. 우리만 남겨둔 채 어딜 다녀오세요?”엄마는 말이 없다.아이들은 엄마의 무관심에 다시한번 두려움을 느낀다.엄마의 입에는 처음 보는 물건이 물려 있었다. 마치 재갈을 물고 계시는 것 같아 아라이가 물었다.“엄마, 누가 엄마의 입에 재갈을 물렸나요?”엄마는 입에 물고 있던 것을 산실 위에 내려놓고 말을 이어갔다.“애들아, 이것은 재갈이 아니라 너희들을 보호해줄 위장막 같은 것이란다.이것은 상수리나무 아줌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물어 온 나무 껍질이란다. 나무껍질과 모래, 먼지 등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재료를 이용해 너희들이 보이지 않게 산실 앞에 붙여서 너희들이 숨을 수 있도록 이 엄마가 물어다가 막을 거란다. 너희 들이 숨어있는 하얀 산실은 겨울철에는 눈처럼 하얗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봄이 되면 천적들의 눈에 뛰기 쉽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 가지 재료들을…
엄마는 거미그물을 떠나 이리저리 왔다갔다 분주하다. 엄마가 무엇을 위해 이리 바쁘게 움직이는지 알 수 없는 나는 너무도 궁금해 엄마에게 물었다.“엄마 뭐 하세요”엄마는 대답이 없다.땅거미가 기웃기웃 서산에 그림자를 남기며 날이 저물어가기 시작했다.산이 높은 이곳에서의 밤은 다른 지역에서보다 한 시간 정도는 빠르게 찾아왔다. 적막한 산중을 감싸는 것은 고요와 어둠뿐 아니라, 계절도 성큼 다가와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해 지고 있다. 겨울이 문턱 앞까지 온 모양이다.아라이는 엄마의 모습이 궁금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옆에 곤히 잠자는 아라크를 깨웠다 “아라크야! 너 혹시 엄마가 왜 저리 바쁘게 움직이시는지 아니?”“그건 말이야. 날이 어두워지니까 숨을 곳을 찾기 위해서 그러는 거야” 아라크는 으쓱해 하며 말한다.“아라크, 그런데 왜 어제와 그제는 엄마가 거미그물에서 잠을 잤는데? 오늘 밤엔 잠자리를 바꾸는 이유가 뭐니?”아라크는 말문이 막혔다.그도 그럴 것이 늘 엄마는 거미그물 안에서 밤을 보냈기 때문에 또 다른 이유를 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아라이와 아라크 그리도 또 다른 형제들 역시 엄마의 행동이 궁금했지만, 엄마의 분주한 모습에 감히 물어 볼 엄두를…